금요일 원유 시장은 그야말로 안도감에 취해 있었다. 미국과 이란이 3개월간 이어진 전쟁의 휴전에 합의하고 호르무즈 해협의 선박 운항 제한을 해제할 것이라는 소식이 돌면서 유가는 1% 넘게 빠졌다. 브렌트유 7월물은 92.67달러로 주저앉으며 주간 기준 10.5%라는, 4월 초 이후 가장 가파른 폭락을 기록했다. WTI 역시 87.64달러까지 밀려났다. 겉보기엔 시장이 평온을 되찾고 있는 듯하다. 그간 하루 1,500만~1,700만 배럴의 원유와 전 세계 LNG 물량의 20%가 묶여 있었음에도 유가가 100~120달러 박스권에서 버텨온 데다, 이제는 휴전이라는 동아줄까지 내려왔으니 시장이 이 위기를 ‘곧 지나갈 일’로 치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시장은 꽤나 위험한 낙관론에 빠져 있다. 지금까지 유가가 버틸 수 있었던 건 수급 밸런스가 건강해서가 아니다. 전략비축유(SPR)의 공조 방출, 해상 부유식 저장고 헐기, 정제 처리량 감축 등 임시방편들이 아슬아슬하게 방파제 역할을 해왔을 뿐이다. 호르무즈가 닫힌 직후 공급 충격이 체감되지 않았던 것 역시 이른바 ‘운송 시차(shipping lag)’ 덕분이었다. 봉쇄 직전 페르시아만을 빠져나온 유조선들이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몇 주가 걸렸고, 이 물량들이 물리적인 공급 공백을 잠시 가려줬다. 그러나 4월 중순을 기점으로 그 마지막 배들마저 모두 부두에 도착했다. 이후로는 각국이 자국 내 재고와 비상 비축유를 갉아먹으며 억지로 버티고 있는 실정이다.
진짜 문제는 이 ‘비상용 방파제’가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는 데 있다. 헤드라인에 찍히는 상업용 재고 지표만 보면 아직 기름이 넉넉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숫자는 일종의 허수다. 전체 재고 중 상당수는 탱커나 파이프라인, 정제 시설을 굴리기 위해, 혹은 저장 탱크 바닥에 깔아둬야 하는 ‘힐(heel)’ 재고로 시스템 내부에 영구적으로 묶여 있어야 하는 물량이다. 사태 직전 전 세계 비(非)비축유 상업 재고는 약 65억 배럴 수준이었지만, 이 중 54억 배럴은 이런 운영 필수 재고로 묶여 있다. 결국 시장이 충격 흡수용으로 진짜 꺼내 쓸 수 있는 가용 버퍼는 11억 배럴 남짓에 불과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대로라면 6월은 시장의 명운을 가를 분수령이 된다. 호르무즈 봉쇄로 시장에서 증발한 하루 1,500만 배럴의 공백을 SPR에서 400만 배럴씩 끌어다 메꾼다 해도, 여전히 매일 천문학적인 적자가 쌓이고 있다. 지금의 재고 소진 속도라면 6월 초중순쯤에는 앞서 말한 11억 배럴의 가용 버퍼마저 완전히 고갈될 것으로 분석된다. 원유 시장은 재고가 운영 하한선에 근접할 때 결코 선형적으로 얌전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약간의 차질만 빚어져도 가격이 기하급수적으로 튀어 오르는 발작을 일으킨다. 물리적인 기름 자체가 부족해지면 정유사나 항공사, 물류업체들은 살아남기 위해 미친 듯이 웃돈을 부를 수밖에 없고, 결국 누군가는 소비를 포기하게 만드는 ‘수요 파괴(demand destruction)’가 올 때까지 가격은 치솟게 된다.
물론 당장 내일 트럼프 대통령이 최종 승인을 내리고 이란 국영 매체가 합의를 공식화해 호르무즈 해협이 뻥 뚫린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IG의 애널리스트 토니 시카모어의 말처럼 “전쟁은 끝났고 합의는 다가온다”는 내러티브가 살아있는 한 유가는 80달러대 초반의 지지선까지 밀려 내려갈 여지가 있다. 하지만 해협이 열린다고 모든 게 마법처럼 원상 복구될 거라 믿는다면 업계의 생리를 너무 모르는 소리다. ING 애널리스트들의 지적대로, 전쟁 기간 동안 저장 한계에 부딪힌 산유국들은 이미 상당수의 업스트림 생산 설비 가동을 멈춰(shut-in) 버렸다. 한 번 세워둔 유정을 다시 돌리는 건 스위치 켜듯 즉각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게다가 분쟁 초기 타격을 입은 중동 지역 정유 인프라가 정상 가동률을 회복하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필요하다. 시장은 당장의 긍정적인 뉴스 플로우에 환호하며 평온한 숫자를 찍어내고 있지만, 그 이면에 웅크린 텅 빈 오일 탱크와 멈춰선 설비라는 묵직한 현실은 아직 조금도 해결되지 않았다.